길 위에 서다/산에 들다

[090530~31]5월에 걷는 지리산 - 행여 견딜만 하거든 오지 말라~

dreamykima 2009. 6. 3. 08:14

날 짜 : 2009년 5월 30~31일 / with 경희

 

코 스 : 첫   날 : 성삼재 - 노고단대피소(아침)- 연하천(간식) - 벽소령 - 선비샘(점심) - 세석 - 장터목(1박) : 누적거리 26.5km

        둘쨋날 : 장터목 - 천왕(일출) - 장터목(아침) - 하동바위 - 백무동 : 누적거리 9.2km : <총 거리 : 35.7km>

         

교 통 : 용산역(22:50) -> 구례구역(03:23) / 22,300원 (홈티켓 할인금액)

       구례구역 (03:30) -> 구례버스터미널(03:40) / 1,000원

       구례버스터미널(04:00) -> 성삼재휴게소(04:45) / 3,200원

       백무동(13:30) -> 동서울터미널(17:30) / 20,200원 

 

행여 견딜만 하거든 오지 말라~ 했거늘 기어이 지리산에 다녀왔다.

 

지난 한 주, 마음이 휑했다.

캠프 다녀온 후유증이 무엇보다 컸고, 게다가 노 전 대통령님의 서거로 멍한 느낌이었다.

무력감에 시달리며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잠 때문에 수면시간은 충분했지만 1주일 내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이상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목요일밤 배낭을 꾸리면서도 내가 과연 걸을 수 있을까~했다.

금요일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억지로 밥 한 그릇을 먹고는 그대로 이불 위에 엎어져 생각해본다.

 

갈 수 있니?

걸을 수 있겠어?

 

몸은 전혀 따라주질 않는게 분명한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리산에 뜨는 달은 풀과 나무와 길을 비추는 것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을 비춘다...고 시인은 말했다.

아무생각없이 지리산을 걷다보면 많은 것이 치유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선명하게 다가올 그 결론이 두려워 차라리 정신적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었다는 어느 학자의 말에 깊히 공감했다.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일단은 가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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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자는둥 마는둥 새벽 구례구역에 내려 성삼재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오늘따라 산객이 참 많다.

 

 

 많은 산객때문인지 버스는 4시 45분이 되어서야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한다.

저 아래로 희미하게나마 마을의 불빛들이 보인다.

하늘엔 구름이 끼었는지 별이 보이지 않는다.

 

 

5시에 성삼재를 출발하여 30분만에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였다.

배가 고파서인지 잠이 모자라서인지 몸이 무겁다.

 

임걸령쯤에 가서 아침을 먹자 했으나 칼로리 보충하기 위해

노고단대피소에서 햇반과 미역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먹고나니 속이 든든해서인지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다.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거쳐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까지 가는 길은 평이해서 걷기에 참 좋다.

축지법을 쓰느냐는 소릴 들으면서까지 여러 산객들을 앞질러 왔는데 그 후로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

 

 

 삼도봉에서 바라보는 남동쪽.

 

 

초록으로 화사한 화개재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보는 지리 주 능선

가운데 안부에 벽소령 대피소도 보이고 그 뒤로 영신봉도 보이고 멀리 촛대봉, 연하봉 중봉도 보인다.

왼쪽 1/3 지점에 우뚝 솟은게 천왕봉이다.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에효~

 

 

 

벽소령 대피소를 12시 06분 출발한다.

 

작년 여름 홀로 걸었을때는 이곳에 도착했을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오늘은 성삼재에서 1시간 40여분 일찍 출발했고 노고단에서 아침식사 시간을 고려하면

작년과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

 

누적 거리 16.8km /  시간 7시간 (2.4km/h)

 

 

벽소령을 지나 선비샘으로 가면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일꺼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1시 10분 겨우 선비샘에 도착하여 역시 햇반과 국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선비샘에서 세석까지 가는 힘든 구간임을 감안하여 좀 느긋하게 쉬었다.

 

세석대피소에는 들리지 않고 질러갈 예정이었으므로 식수를 충분히 보충하고 다시 출발.

 

 

 아까보다 촛대봉과 연하봉 천왕봉 등이 훨씬 가까워졌다.

 

 

아! 영신봉이 보인다.

저 오르막길만 넘어가면 세석이다.

 

선비샘에서 분명 함께 출발했지만 장터목에 도착할때까지 경희를 보지 못했다.

이 녀석 날아갔나보다~ ㅠㅠ

 

 

영신봉 오르는 끝간데없는 계단.

다리가 천근 만근이다.

위를 보지 않고 발 밑만을 보며 하나씩 하나씩 올랐다.

 

제자리에 서 있으면 그냥 그 자리지만 한 발이라도 뗄 수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누구는 자신의 생을 증명하기 위하여 목숨도 버렸는데 이까짓 계단이 내 생에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고...

별 별 생각을 다하면서 저 밑바닥에 있는 모든 의지력을 끌어올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떼어본다.

 

 

드디어 힘든 구간인 영신봉을 지났다.

세석평전의 철쭉들을 보기엔 조금 이른 듯 싶었다.

 

 

우측길은 세석대피소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길은 촛대봉으로 질러 가는 길이다.

대피소에는 들릴일이 없었으므로 촛대봉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경희는 20여분 전에 벌써 여기를 통과해 갔다고 한다.

 

 

촛대봉 오르는 길에 내려다 본 세석대피소 전경.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세석에서 촛대봉은 0.7km밖에 안된다.

근데, 그 거리가 7km는 되는 것 같다.

아직 3km정도를 더 가야만 하는데 온 몸이 정말 무겁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의 구간은 평이한 구간이다.

경희가 이미 갔으므로 대피소 배정이야 걱정없으니 쉬엄 쉬엄 가기로 했다.

이제 오후 4시를 갓 넘었으니 적어도 6시까지는 충분히 장터목에 도착하리라~ 싶었다.

 

 

거림지구에서 올라오셨다는 직장 동료들로 이루어진 산객들.

저 분들과 장터목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서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잠시 쉬면서 성삼재에서부터 걸어온 참이라 했더니 믿질 않더라.

할 수 없이 디카에 들어있는 사진 보여주었다.

많이 놀라더라~ ^^

 

하긴 나도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는데...

 

 

아름다운 연하봉 구간을 지나면서...

 

 

아~ 이제 다 와 간다.

몇 백 미터만 가면 장터목이다.

 

내리막길이므로 이제나 저제나 걱정하며 나를 기둘리고 있을 경희를 떠올리며 서둘러본다.

 

 

 PM05:47 / 누적 거리 26.5km / 누적 시간 12시간 47분

 

해냈다.

오른쪽 층계 밑에 주황색 옷을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희가 보인다.

녀석이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우리는 멋지게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장터목은 다른 대피소와 달리 5시에 자리배정을 했다고 한다.

사람이 많아 못 올 사람들은 빨리 빨리 걸러내고 대기자들을 받기 위함이라 했다.

 

경희는 자리배정과 모포 교환권을 받아두고

바람이 들지않은 탁자 한 구석에 자리를 맡고는 쌀을 씻어 불려두고 있었다.

5시경에 도착했다 한다.

 

이쁜 녀석.

 

 

햇반이 아닌 따스한 밥과 제육볶음 한 점에 소주 한 모금.

세상에 부러울게 없는 만찬이었다.

 

밥을 먹고 나니 장터목대피소는 구름에 휩쌓였다.

그리고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피소 자리 배정을 못 받고 비박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던데 내가 다 걱정이 되었다.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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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경 전화가 오는 진동소리에 잠깐 깼는데 밖의 바람소리가 얼마나 세찬지 그 후로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귀마개를 찾아 귀를 틀어막았음에도 바람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비박하는 사람들은 저 바람에 어찌 잘까 싶기도 하고...

저 바람이 모든 구름을 몰고가서 내일 일출을 볼수도 있겠구나~싶기도 하고...

 

두어시간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소란스러움에 깨어났다.

옆에 둔 핸드폰을 들어보니 3시 42분.

일부러 알람을 맞춰두지 않았었다.

경희도 나도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자연스레 깨어난다면 일출을 보러가자~했다.

 

경희도 힘들었는지 잠에 취해 쉽게 일어나질 못한다.

강제로 깨워 담요 하나씩과 물 한 병과, 램프와 디카만을 들고 4시경 천왕봉을 향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천왕봉 일출을 보았다.

둘 다 힘들었지만, 일출로 모든것이 보상이 되는 듯 싶었다.

 

 

 

앙상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살아남아

하늘을 찔러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사이좋게 늘어서서

내 간절함 이토록 벌거벗어 빛남이여

<이성부 시인의 '고사목' 中>

 

 

 

 

 

올라가는 시간도 1시간이었는데 내려오는데도 1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힘이 들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음에도 새벽 바람이 무척 찼다.

빨랑가서 다시 누웠으면 싶었다.

 

 

날씨가 좋고 운해와 산능선들이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그림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대피소에 돌아가 다시 누웠으나, 곧이어 모포를 반환하라는 방송이 들린다.

1시간이라도 눈을 좀 붙이려 했건만...쩝~

하긴, 모두들 배낭을 들고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중산리로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피소 침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장터목대피소의 아침은 다른 대피소보다 이르게 시작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일어나 짐을 정리하고 아침을 해 먹었다.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한 시각이 오전 8시 30분.

서울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고려하여 백무동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백무동까지는 5.8km.

설렁 설렁 걷는다해도 12시 전에는 하산을 할 수 있을것이고 점심 먹고 생각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백무동 등산로 입구에 11 10분경 도착하였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세족의 즐거움도 누려보고...

 

 

꽃이 졌네~

덧없다.

생이 또한 이와 같으니...

꽃 지고 난 뒤 슬퍼말고 피어있는 화사함을 즐기며 살자~

 

5/31 AM11:30분 백무동 입구 이정표에 도착하였다.

 

1박 2일동안 잘 버텨준 나 자신의 의지력과 건강함에 감사한다.

또한, 함께 해 준 경희 고맙다.

네가 없었다면 절대루 못 견뎌냈을꺼야~

 

다시는 장터목까지 오지 말자~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어쩌면...

또 다시 가슴 먹먹해지는 일이 있다면 또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지도... 

 

가을에 이쁜 단풍이 들면 다시 지리산에 들기로 했다.

그 때는 세석까지 설렁 설렁 지리산을 즐기며 걸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