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220]소백산 세찬 바람속에서 외할머니를 배웅하다.
날 짜 : 2009년 12월 20일 / 나홀로
코 스 : 천동리 - 비로봉 - 비로사 - 삼가리주차장
교 통 : 동서울 -> 단양 : am6:59 / 12,100원 / 2시간 소요
단양 -> 천동리 소백산 북부사무소 : 택시 / 8,500원
삼가리 -> 영주 : pm2:50 / 1,100원 / 35분 소요
영주 -> 동서울 : pm3:45 / 13,600원 / 3시간 소요
상여 소리꾼이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소리를 한다.
못가겠네 못 가겠네
차마 서러워서 나는 못 가겠네
소리꾼의 선창에 이어 상여를 멘 상여꾼들의 소리가 뒤를 잇는다.
어허~어 어~허~
다시 소리꾼의 소리가 이어지고 뒤를 이은 상여꾼들의 어허~어 어~허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꽃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진 속 당신을 앞세워 당신이 한평생을 사셨던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회관 앞에는 황량한 겨울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꽃 상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상주이신 큰외삼촌과 작은외삼촌, 엄마 아빠, 외숙모님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 외할머니의 상여를 앞에두고 노제를 지냈다.
노제를 지낸 후,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섰다.
키와 몸집이 작으셨던 당신에게 목관이 너무 길고 컸던것처럼 상여 또한 맞지 않은 옷처럼 너무 크고 길어보여
먼 길 떠나시는 당신께 그들이 너무 거추장스럽지나 않을까~ 나는 서러웠다.
평생을 가만 가만 그림자처럼 당신 의견 한 번 제대로 피력하지 않고 살아오신 내 외할머니.
마을 회관을 떠난 상여는 당신이 수만번도 더 지나 다니시던 작은 길들을 지나 집앞에서 한참을 섰다가 나즈막한 산길로 올라갔다.
팔순을 넘기신 당신의 장례는 호상이라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지만 먼 길 가시는 당신을 배웅하는 우리는 그저 서럽고 서럽기만 하였다.
잘 해 드린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왜 그리 못 해 드린 생각만 나는지......,
나는 당신이 가시는 그 길이 슬프다기보다 서운하고 또 서운하였다.
나는 4~5살 때의 기억을 하지 못하면서도 당신과 함께였던 3살때의 기억을 또렷히 안고 산다.
집안의 금쪽같은 장손인 만 두 살 터울의 남동생(동생과 나는 생일이 같다.)이 태어나자 3살이었던 나는 엄마의 손을 덜기 위해
잠시 외가에 맡겨졌다.
당신은 시어머니이신 내 외증조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허리가 90도로 굽으신 외증조모를 나는 꼬부랑할머니로 기억한다.
문지방이 높아 내가 깨금발을 들고 온 몸에 힘을 실어야만 겨우 넘어 다닐 수 있었던 작은 방들.
그 방을 이쪽 저쪽으로 다니시면서 내가 좋아하던 배를 깎아주신 일이며
안방 앞에 있던 나무마루에 커다란 홈이 있어 내 발이 자꾸 빠졌던 일이며...
어린 나이에 남동생에 치어 외가로 가야만했던 나는 아마도 그것이 서럽기도 하였을터이다.
그 서러움에 두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 시절이 아마도 내게 크게 각인될 수 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12일, 내게 사랑이 많으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14일,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길을 가시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온 뒤로 마음이 편치않아 어쩔줄을 몰랐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나는 소백에 든다.
소백의 세찬 바람들은 흩어지는 내 생각들을 정리해주고 다잡아준다.
19일은 걷기모임의 정기도보일이었다.
미처 취소하지 못하고 양평에 있는 화야산을 다녀왔다.
피곤하였으나, 꼭 소백에 들고 싶었다.
그리고, 절집에 들러 불자이셨던 내 할머니의 명복을 빌고 싶었다.
전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주섬 주섬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추운 날씨와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속에 고생스러운 길이었지만 소백에 다녀와서 참 좋다.
일부러 삼가리쪽으로 내려가 할머니를 위해 비로사에 들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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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고수대교 밑을 흐르는 충주호가 얼어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얼었다고 했다.
천동리 계곡
천동야영장 쉼터에 서서 산 위를 바라보니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묽게 끓인 깨죽을 한 컵 마셔 몸을 따스하게 한 다음,
이제까지는 벗어제끼고 왔던 폴라텍 재킷을 껴입고 고어텍스재킷을 입고
여분의 장갑과 버프를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두고 길을 재촉해본다.
모두들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그냥 쉬엄 쉬엄 가보기로 한다.
물론, 여차하면 착용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도 꺼내기 쉬운 옆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날이 추워서인지 단체산행을 온 산객들말고 개인 산객들은 거의 없다.
전 날, 소백산 북부사무소에 전화를 넣어 등로 상태를 체크 해 두었었다.
그 때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등로 상태를 보니 아마도 간밤이나 새벽에 눈이 좀 내린 듯 하다.
천동 야영장을 지나 샘터를 지나면서부터 온 세상이 하얗다.
현재까지는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어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소백의 겨울 바람은 너무나도 유명한지라 꽁꽁 싸매고 온 덕에 디카를 꺼냈다 넣었다 하는 손끝만 시리지
아직까지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능선의 바람에 내 맡겨지게 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여분의 장갑과 버프를 꺼내어 더 두르고 옷깃을 더 여며본다.
능선에 올라서기 전, 귤과 비스킷 몇 조각으로 속도 든든하게 채워본다.
주목관리소가 사라진 지금 소백의 능선에선 어디에서고 바람을 피하며 밥을 먹을 공간이 없다.
아~ 그대는 겨울 소백에 서 보았는가~
앞서 가는 저 분은 뒤따르는 내가 불안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나 또한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이 휘청거려
저 나무기둥을 잡고 온몸으로 바람을 이겨내며 서 있어야만 했다.
그저 빨리 정상에 올라 삼가리쪽으로 내려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바람이 너무 세차서 균형잡기가 어려워 걸음을 빨리 할 수가 없었다.
소백산의 겨울 바람을 맞아보지 않고 어찌 말 할 수 있을까~
세상엔 분명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 바람을 맞아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무리 상상을 한다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상상을 한다해도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끝으로 디카가 렌즈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갑자기 아웃되었다.
처음엔 너무 추워 얼어붙었나~했다.
다급하게 폴라텍 재킷 안쪽에 넣어두고 손을 넣어 작동을 시도 해 보았으나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너무도 심한 추위에 밧데리가 급격하게 아웃된 것이었다.
어의곡에서 올라오는 길.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바람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오르는 산객들을 볼 수 있다.
오른쪽에 북서풍을 고대로 맞으며 오르는 길...보는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질만큼 춥다.
밧데리를 꺼내어 품에 안고 있다가 다시 넣어보니 다행히 작동이 되었다.
사진을 한 장 찍을때마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해야했다.
나중에는 너무 추워서 귀찮아졌지만...
국망봉으로 가는 능선.
바람의 영향이 덜한 영주쪽은 상고대도 없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기까지 한다.
하늘은 파랬으나, 구름의 이동이 얼마나 빠른지 마치 자동차들이 고속국도를 달리는 듯 했다.
유일하게 북서쪽을 보고 찍은 사진인데
바람이 너무 세차서 구도고 뭐고 상관없이 셔터가 눌러진게 신기할 따름인 사진 한 장.
너무 추워서 장갑을 끼고 셔터를 누르려고 버벅대는 시간에 카메라가 아웃된다.
사라진 주목관리소 자리가 너무도 허전해보여 사진을 찍으려 몇 번 시도하다 실패하고는 그냥 포기했다.
국망봉 능선
이 사진들은 좀 더 편하게 찍을 수 있었는데 비로봉 정상에서 삼가리쪽으로 20~30여m 내려서서 찍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만 내려서도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잠깐 사이에 지옥과 천당을 온 간 듯 했다.
삼가리로 내려서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아무래도 걱정되어 옷차림새들을 살피며 내려가는데 대부분이 전문 산객들처럼 보였지만
몇 몇은 옷차림새가 초보처럼 보여 불안 불안했다.
소백산 달밭골 비로사 적광전 앞의 돌탑.
비로사로 내려서니 채 2시가 되지 않았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고요한 절집에서 비로사 부처님께
불자이셨던 외할머니를 위해 향을 피우고 가만 가만 절을 올렸다.
서늘한 바닥에 한참을 앉았다가 향불을 끄고 재를 확인한 다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