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바래봉 산행기 - 홀로 길을 나서다.
날짜: 2002년 5월 4일 ~ 5일 무박 산행 / 나홀로
어두운 밤, 10시 반 집을 나선다.
배웅해줄 이 없는 캄캄한 방안에서 내 방 천장에 빛나는 별들만이 잘 다녀오라는 무언의 인사를 한다.
오늘따라 졸립고 피곤하다.
피곤을 무릅쓰고 꼭 가야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지만 손은 이미 배낭을 잡고 있다.
나오는 하품을 참아가며, 집을 나선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간다.
그 순간, 머뭇거릴새도 없이 답이 나온다.
말할 수 없는 자유가 느껴진다.
가끔은 서울 하늘에도 별이 빛난다.
오늘밤이 그런 날이다.
지난 주에 빛나던 그 보름달은 이미 반달이 되었지만......
"지리산에 뜨는 달은
풀과 나무와 길을 비추는 것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을 비춘다."
........고.....어느 시인이 그랬다........
나도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달빛줄기를 찾아 길을 나섰다.
11시 50분. 진주행 마지막 열차.
기차를 타자마자 잠을 청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나오는 하품을 참아서인지,
덜컹거리는 기차의 바퀴소리도,
정차역마다의 소란스러움도 뒤로한채 쉽게 잠이 들었다.
익산을 지나면서부터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3시가 조금 넘었나.
전주. 임실, 오수. 정차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또렷하게 들린다.
4시 25분 남원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내리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나중에 알고보니 여행사 단체여행객들이다.
그들은 역을 나서자마자 역광장에 세워져있던 관광버스에 올라 온천을 향해 간다고 했다.
남원역광장에는 춘향제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많다.
이른 새벽.
낯선 역 낯선 화장실 한귀퉁이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까지 했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들고 역사를 살펴보니
졸리운 눈을 하고 역사를 지키는 역무원 한명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젊은 남자 한명.
그리고,
그 이른 새벽에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노부부 두 명이 있다.
노부부의 차림새를 보니 등산복 차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말을 건넸다.
바래봉으로 가신다고 한다.
왜 이른 새벽에 혼자 왔느냐?
무섭지도 않느냐? 는 말들을 귓전으로 흘리며 택시를 타고 운봉으로 향했다.
15,000원을 달라고 한다.
원래 미터 요금을 받을텐데......하긴.. 그 새벽에 별다른 차편이 없으니 뾰족한 수가 없다.
택시를 타고 가며 보니 바래봉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던데.........
아직 하늘에 달은 있는데........
어둑하던 하늘이 금새 밝아져 온다.
운봉쪽은 이미 모내기가 끝난 논들이 많고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어 놓은 논들도 많다.
모내기가 일찍 시작되는 곳이란다.
산밑에 도착하니 5시 반이 조금 못 되었다.
노부부는 단순한 등산객이 아닌 사진을 찍으러 간다 하셨다.
전주에서 오셨다는 말씀에 반가워 얘기를 나누며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노부부의 안내로 예기치 않은 산길로 접어 들었다.
이쪽길로 가면 능선에 금새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차 몇 대가 길 옆에 세워져 있는것을 보니 벌써 올라간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꽤 넓은 임도인데 차가 더이상 진입을 못하도록 쇠말뚝을 박아 놓았다.
임도 옆으로는 물이 흐른다.
어찌나 맑은지.........
산길이 가파르지 않은 임도인데다가 아무래도 젊은 내 발걸음이 빠르다.
앞서 걷기 시작한다.
임도를 따라 흐르는 맑은 계곡 물소리와 산행 초입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눈부신 아침햇살에 산과 들 눈뜰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양희은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6시 30분. 능선에 섰다.
세걸산 바로 밑이다.
좌측길로 가면 부은치이고 우측길로 가면 정령치 가는 길이다.
정령치쪽은 입산금지 표지판이 서 있다.
산불방지기간이라 막아 놓은 등산로가 많다.
능선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제법 많은데....등산객은 몇 명 없고 모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카메라와 커다란 렌즈, 삼각대를 들고 이쪽 저쪽에 흩어져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구름속에 숨었으나 해는 이미 떠 있다.
생각보다 철쭉이 더 많이 피어있다.
아직 꽃망울만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제법 꽃이 피어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다.
부은치를 지나 팔랑치 부근으로 가니 철쭉이 더 많이 피어있다.
아직 만개를 하지 않았으나, 철쭉 군락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동남쪽으로는 지리산이다.
천왕봉이 한손에 잡힐듯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지도를 꺼내들고 능선과 대조해보며 하나 하나 봉우리들을 짚어본다.
지난 여름에 힘겹게 걸었던 그 봉우리들을 오늘은 그리움을 담아 눈으로만 좇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산객들이 많아진다.
그래도 아직 이른 시각이다.
팔랑치 철쭉 군락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리산이 저 멀리서 웃고 있다.
나를 부르는 듯 싶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팔랑치를 벗어나면 철쭉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바래봉 정상에 올라서려면 잠시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9시가 조금 넘었나.
정상에 앉았다.
이제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저멀리 천왕봉을 지나 중봉, 하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쯤이 세석일게야.
조금 있으면 저곳도 철쭉이 흐드러지겠구나.
어찌하면 그 철쭉을 볼 수 있을꼬.........
얼려온 맥주를 꺼내어 옆에 앉아계신 어르신께 반을 나누어 드리고 한모금 털어넣으니 어찌나 시원하든지..........
아~~좋~~~~다.
이러고 앉았으니 세상에 부러울게 뭐가 있겠노.
잘하면 12시 전에 남원에서 고속버스를 탈 수 있겠다 싶어 내려가려는데
맥주 한컵 얻어 드시고 이얘기 저얘기 나누던 그 어르신께서 산악회에서 오셨다며 자리가 남으니 얻어타고 가라신다.
지난 번 월출산에 가서도 정상에서 만나 함께 하산한 인연으로 그 버스를 얻어타고 왔는데..........
사람들 말처럼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1시에 용산리 주차장을 출발하여 동대문운동장까지 오니 5시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