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길을 나서다.
2008년 11월 14일 늦은 밤.
한기가 도는 11월의 밤바람을 느끼며 작은 배낭을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늦은 시각에도 용산역은 참 부산하다.
배낭을 둘러멘 사람들...꽤 묵직한 배낭을 보니 아마도 지리산을 가는 사람들인가 보다.
8월과 9월에 걸었던 그 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다.
따스한 봄날이 오면 그때 다시 그 길에 서야지~
나름 잘 차려진 양복 차림의 사람들은 저 아랫녘 고향 어디쯤에서 있을 잔치에라도 가는가보다.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
작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혼자서 서성이는 나는 저들에게 어찌 비춰질까?
한 번도 궁금한 적 없었지만, 오늘은 누구라도 하나 붙잡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밤 10시 50분, 기차는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검게 유유히 흐르는 한강 다리를 지나 영등포에서 내 동행을 태웠다.
1-1. 여수의 새벽을 보다.
2008년 11월 15일 새벽 4시 34분.
깜빡깜빡 점점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작은 등불이 켜진...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
어둠 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작은 도시들을 지나 육중한 기차는 우리를 새벽 여수역에 내려주었다.
잠시라도 눈을 붙였으면 좋으련만~~~
차가운 맥주 한 캔과
휙~휙~ 기차가 훑고 지나가 버리는 내 현재의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에 쌓여 밤새 떨었던 내 육신의 피곤함을 이끌고
나는 그렇게 다시 새벽 여수역에 섰다.
이상하게도 여수역에 내리면 내 코를 확~하며 자극하고 들어오던 비릿한 바닷내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미 이곳에 익숙해져 있는걸까~
나중에 여수항을 걸으면서 보니 해양엑스포의 영향인지 많이 정비되었다.
그래서 비릿한 내음들도 많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갈 길을 재촉하고 역은 금세 한산해지며 새벽의 고요함이 나를 감싼다.
육신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알싸한 새벽 공기가 내 폐부속으로 밀려 들어오며 내 머릿속을 맑게 한다.
사위는 아직 컴컴하다.
예전에는 여수역에 내리면 거의 6시가 다 된 시각이었으므로 감람빛 새벽이 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가 있었는데
KTX가 생겨나고 밤기차 시각들이 조정된 다음에는 좀처럼 그 느낌을 가질 수가 없어 안타깝다.
새벽 도로를 따라 걷다가 여수항쪽으로 길을 잡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너무 이른지라 고기잡이 배들이 보이질 않는다.
부지런한 아주머니들 몇이 모닥불가에 서서 배가 들어오는 것을 기둘리고 있다.
새벽 조업을 갔던 사람들이 들어오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돌산대교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오늘은 돌산대교까지 걸어간 다음, 그곳에서 향일암으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다.
2. 바다를 품고 있는 절집, 향일암에 닿다.
돌산대교를 넘어 6시경에 향일암 임포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6시 35분경 우리를 임포 정류장에 내려놓았다.
11월 즈음에 남해바다의 일출은 7시경이다.
헉헉대며 절집까지 올라야 함을 알고 있기에 지체없이 오르기 시작한다.
다리 근육이 한껏 당겨질만큼의 급경사에 헉헉대고, 몇 년 전 뜬금없이 세워진 향일암 일주문을 지나 끝없어 보이는 계단을 오른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 길은 그냥 산길이었다.
변변한 일주문도 없었지만, 인위적으로 세우지 않아도 이곳에는 엄연히 일주문이 존재했었다.
무엇이건 변해 가는 것에는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는 그대로 있어주는 변치 않는 무언가를 찾게 되는가보다.
향일암의 진정한 일주문은 이곳이다.
마음의 욕심뿐 아니라 육신의 욕심도 버리라는 뜻이리라~
탐욕을 가지고 이 문을 건너면 바위가 점점 좁혀온다는 소리도 있다. ^^
문득,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떠올린다.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진리는 항상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향일암에서 볼 수 있는 거북 등껍질 무늬의 바위들.
이런 자연의 오묘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줍잖게 어떤 설명을 가져다 붙이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순순함이 필요한게 아닐까~
2-2. 향일암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다.
향일암 아래 임포라는 작은 포구에 '금오정'이라는 민박집이 하나 있었다.
울 부모님과 연세가 비슷하신 부부가 운영을 한 2층집으로 된 민박집이었다.
오래전,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와서 묵었던 곳이었다.
주인아저씨께서 그러셨지~
향일암에서 일출을 보고 싶거든 이른 봄에 오던지 이른 겨울에 오라고...그래야 해무가 없이 깨끗하게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항상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살면서...언젠가는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일출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향일암 관세음보살님께 내 진정을 실어 108배를 올리고 싶었다.
그런 내가 어여뻤을까~
바다에서 빨갛게 솟아오르는 둥근 해를 볼 수 있었다.
두 손을 모아 감사드렸다.
향일암은 관음 기도 도량이어서인지 관음전이 두 개다.
아래의 관음전은 하 관음전 또는 용왕전이라고도 한다.
나는 해수관세음보살님이 서 계신 상 관음전에 올라 일출을 보고 전각 안으로 따스하게 밀려 들어오는 아침의 첫 햇살을 받으며
관음보살님께 천천히 108배를 올렸다.
나는 불자는 아니다.
불교의 경전을 공부해본적도 없고, 이렇다 할 절집의 예절에 대한것들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내 진정을 담아 향일암의 관세음보살님께 나의 현재를 말하고 싶었음이라~
108배를 올리고 두 손을 모으고 나니 붉은 햇살을 받은 관음보살님이 빙그레 웃으시는 듯 보였다.
향일암을 나와 금오정을 찾아가 보았다.
간판은 보이지 않고 무슨 교회가 하나 들어서 있는데 동네 주민께 여쭈니
주인아저씨는 3년 전 돌아가시고, 아주머니께서는 여수로 나가셨다 했다.
내가 2004년에 들렀을때만 해도 정정하던 분들이셨는데...
3. 돌산도를 유람하다.
잠을 설쳐가며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왔던 건 향일암에서 일출을 보고 108배를 하기 위함이었다.
떠나온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너무도 쉽게(?) 원하던걸 얻고 나니 갑자기 나른해진다.
순천으로 이동해서 선암사를 보고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를 보러 갈까 생각했으나, 바쁘게 허둥대야만 하는 게 참 싫다.
임포마을 주차장에 서 있는 버스를 보았으나, 그냥 설렁 설렁 걷기로 했다.
아침도 든든히 먹었겠다~ 시간도 많고~ 바쁠것도 없고~
향일암에서 율림리까지는 약 3km 율림리에서 재를 넘어 돌산도 서쪽으로 가보기로 하고 걸었다.
적어도 율림치에서 옆으로 새는 임도를 만나기 전에는...
율림치 오르기 전 있던 내 호기심을 자극한 풍경.
혼자였다면 분명히 저 길 끝에 들어가 보았으리라~ ^^
율림치 오르는 길에 보이는 율림리 풍경.
율림치를 넘어 성두마을로 가기전에 옆으로 들어선 임도.
어떤 목적인지 모르지만 꽤 잘 정비된 임도였다.
초반에는 이렇듯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지만 중간에는 흙 길이었다.
저 길 끝에 바다가 있다.
저 길 끝에는 하늘이??? ^^
푹신 푹신했던 흙 길.
참 이쁜 길이네~
예기치 않게 이런 길을 만난 행운이라니~~~
임도에서 내려다보는 남해바다 풍광
나중에 내려와 지도를 보니 우리는 돌산도에서 가장 높은 봉황산 능선을 넘나들며 한바퀴 돌아 내려온 것이었다.
보이는 하얀 길이 죽포로 내려가는 임도의 연장이다.
'키마고도' ㅋㅋ 맘에 드는 이름이다.
함께 한 동행이 붙여주었다.
임도는 봉림마을에서 끝나게 되어 있다.
산림청에서 세워놓은 이정표를 보니 죽포-율림치간 임도 7.08km 라고 되어 있다.
보이는 마을이 죽포다.
가운데 보이는 느티나무들은 수령이 무려 1000년이 넘은것도 있다.
여기는 논이지만 바로 이웃한 밭들에는 유명한 돌산의 갓들이 파릇 파릇 자라나고 있었다.
죽포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에도 밥 한공기를 뚝딱 해치워놓고는 무얼한게 있다고 그리 배가 고프던지...
점심을 들고는 바닷가 길을 따라 무슬목까지 걸어갈 참이었지만, 피곤을 이기지 못했다.
버스로 돌산대교를 넘어오면서 찍은 여수항.
결국, 버스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이동하고 있다.
순천으로 갈 예정이다.
4. 순천만의 일몰을 만나다.
순천에 도착한게 3시 30분쯤이었던가~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넣으니 타이어를 점검하고 있는중이라 했다.
20여분 걸린다기에 나중에 오라하고 택시를 탄다.
날씨도 좋고 예까지 왔으니 일몰을 제대로 봐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순천터미널은 예전엔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이 나뉘어져 있었으나 근래에 경영상의 이유로 다시 합쳐진 모양이다.
꽤 번잡했다.
터미널에서 순천만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갈대축제가 끝나 사람이 많지 않을줄로 생각했으나, 바로 옆 벌교의 꼬막축제 영향인지 아님 유명세를 탄 순천만의 일몰 때문인지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그래도 그 사람들 틈을 헤치고 용산전망대까지 올라 원하던 일몰을 보았으니 복이 많다. ^^
순천만의 갈대밭.
서녘으로 기우는 햇살이 부드러운 개펄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시는가~
바다에도 길이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얼굴보기 어려우니 다음에 오면 어떻겠느냐는 지인들과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때문에
기차표를 예매했다 취소했다를 반복했었다.
주말이 다가올수록 뭔가 알 수 없는 초조감이 밀려들었고, 웬지 향일암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과감히 기차표를 사들었다. 그리고는 금요일 하루를 가슴설레며 보냈다.
동행이 생길꺼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퇴근시간에 갑자기 문자 한 통이 날아들기전까지는...
내내 주말 동안에는 전국에 비가 내릴꺼라는 예보때문에 일출과 일몰은 꿈도 꾸지 않았었지만,
새벽 여수역에 내려 아직은 둥근 하현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에 얼마나 즐거웠는지...
예기치않은 동행으로 인해 쓸쓸하지 않은 여행길이 되었다.
게다가 멋진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었으니 서로 복 받은게 틀림없다.
순천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고, 저녁식사 후 늦은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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