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8~9일 우리는 태백산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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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30분 전.
언제나처럼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회사를 나섰다.
정각 오후 2시 기차.
청량리에 15분전에 도착해서 표를 끊고 기다렸지만 언제나처럼 내 친구들은 나타날줄을 모른다.
'오늘도 기차를 잡아야 하는가 보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늦장꾸러기 친구들을 둔 덕에 기차를 느긋하게 타본적이 별로 없다.
다행히도 7-8분 전 한 친구가 나타나더니 곧이어 또 한 친구가 온다.
출발 3분전인데 아직도 한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발을 알리는 연이은 안내방송이 사람을 초조하게 한다.
두 친구를 먼저 내려보내 여객전무님을 잡으라 하고 검표원 앞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기차는 떠나기전에 기적을 울린다.
그러나, 기적소리보다 더 중요한것이 여객전무의 출발신호다.
여객전무님께 하소연을 하면 1-2분 정도는 출발을 지연시킬 수 있다.
최장 4분까지 기차를 잡아본적이 있다.
늦장꾸러기 친구들을 둔 죄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노하우다.)
출발 시간 몇초 전.
다행히도 멀리서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
'뛰어'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가야할길이 멀다.
꼬박 4시간 반을 가야 태백역이다.
캔맥주를 하나씩 따들고 소풍가는 초등학생마냥 즐겁다.
서울을 벗어나니 한강의 물줄기가 시원스럽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결도 눈부시다.
덕소에 이르는길은 강과 기차가 함께 달린다.
강가에는 약간씩 살얼음도 보인다.
강원도로 향하는 기차는 언제나 즐겁다.
따스한 햇볕이 차창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온다.
한숨 늘어지게 자고나면 태백역이련만 오랜만에 떠나는 길이라 차창밖의 풍경들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다.
조금은 익숙하고 조금은 낯설은 그 풍경들.
논에 가지런히 서 있는 볏짚들이 정겹다.
도대체 넷이서 맥주 몇 캔을 땄는지 셀수도 없다.
다행히도 낮이라 기차안이 우리말고도 소란스러워 그다지 옆사람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마음껏 수다를 떨 수가 있었다.
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것을 보았으니 영월을 지나면서까지는 낮이 환했던 모양인데 그 다음엔 세상 천지가 온통 깜깜하다.
6시 35분.
한 낮에 떠난 길을 깜깜해져서야 종착역에 닿았다.
아직 눈이 본격적으로 오지 않아서인지 태백역에 내려서는 등산객들은 많지 않다.
세번째 길인지라 지리가 익숙하다.
태백역을 나와 역 광장을 가로질러 오른쪽 허름한 붉은 벽돌색 건물이 시외버스와 시내버스 승차장이다.
6시 45분.
당골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7시가 조금 넘어 태백산 민박촌에 도착을 했다.
태백산 민박촌은 태백시에서 운영하는 민박촌인데 식기가 없다뿐이지 콘도와 전혀 다를바가 없을 정도로 시설이 좋다.
예약해두었던 9평짜리 방은 꽤 커서 6-7명이 들어가도 충분히 수용가능할 정도이다.
가격도 35,000원이니 무지 저렴하다.
주섬 주섬 챙겨온것들을 꺼내 놓고 저녁을 먹었다.
캔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탓에 소주는 넷이서 한 병으로 끝내기로 했다.
다른때같으면 날밤을 새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만 이미 수다는 기차안에서 질리도록 떨었다.
벌써 12시.
내일의 산행을 생각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7시.
정확히 울려대는 휴대폰의 알람소리에 잠이 깨었다.
창문을 활짝 여니 싸늘한 바람이 스친다.
시원하고 상쾌하다.
하늘은 구름이 끼었는데 눈이 올 구름은 아니다.
곧 거치겠지.
세명이서 씻고 노닥거리는동안에 친구 하나가 10분 먼저 일어나 아침준비를 다 해 놓았다.
아침을 들고 커피까지 마신 다음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고 배낭에 먹을것을 분배하여 넣고 10시가 다 되어서야 민박촌을 출발했다.
당골광장을 지나 약 1km정도는 어느 산밑에나 가면 그러하듯 그냥 산책길이다.
계곡을 옆으로 두고 왼쪽길로 난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가뭄이라 물이 말라 버렸을줄 생각했는데 눈이 와서일까.
물이 흐른다.
계곡 군데 군데 얼음이 때로는 종유석처럼 자라있고 때로는 터널을 이루고 때로는 수정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인다.
길에도 잔설이 보인다.
얼마 전 내린 눈 탓이다.
하늘이 눈이부시도록 파랗다.
파란 하늘을 유독 좋아하는 나지만 오늘만은 저 하늘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눈이 왔으면 하는 바램탓이다.
태백산은 가파르지도 않고 험하지 않아 초보자나,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다.
등산 코스에 따라 달라지긴 하나 쉬엄 쉬엄가도 2시간이면 천제단에 이르고 하산까지 4시간이면 족하다.
10시에 출발했는데 망경사에 도착하니 12시가 못 되었다.
망경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망경사를 지나 천제단으로 향하는 길에 龍井이라는 우물과 龍閣이 있다.
그 절 입구의 龍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샘물로 개천절에 올리는 천제(天祭)의 제수(祭水)로 쓰인다.
천제의 제수로 쓰인다 하여 감히 떠 먹어 볼 엄두도 못 냈지만, 안내표지판을 읽어보니 不淨한 사람이 마시면 물이 混濁해진다고 한다.
천제단을 향해 오르는길 (해발 1,500m쯤)에는 비운의 어린 왕인 단종을 모신 단종비각이 있다.
살아생전 단종을 지극히 모시던 차익현(?)이란 사람이 단종을 기리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꿈속에서 단종은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영월에서 죽은 비운의 왕이 왜 태백산까지 와서 산신령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권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단종을 모신 그 충정은 높히 살만하다.
천제단에 오르니 북서풍의 바람이 제법 차갑기는 하나 오늘은 그래도 따스한 편이다.
어떤 중년의 부부가 과일과 포도주까지 챙겨와 천제단에서 나름대로의 제를 지내고 있다.
민족 태초의 조상앞에 올리는 술이 서양에서 넘어 온 포도주라니....그 부자연스러움이라니.......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경건한 제를 올리고 다섯배를 올린다.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릴때는 다섯번 절을 해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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