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서다/길에 서다

휴가 그 짧은 이야기 1 - 바람을 닮다.

dreamykima 2007. 8. 10. 13:09

날 짜 : 2007년 8월 5일

 

지난 봄부터 남도 어딘가가 그리워 몸살을 앓았다.
동백이 투둑 투둑 지는 백련사에도 가보고 싶었고,
강진 앞바다가 보이는 다산 초당 정자에 앉아 한가로이 책 한 권 읽고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바닷가 이름없는 포구를 서성거리다 너른 개펄 너머로 지는 붉은 해도 그리웠고,
그렇게 어둠이 숨어들면 바다가 보이는 어느 할머니집에서 하룻밤 묵고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야말로 생각만 하고 지난 봄을 보냈다.

 

많이 바쁜 2007년을 보내고 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서 덜컥 맡은 일이 나를 숨가쁜 분주함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남들 다가는 날짜에도 맞추지 못하고 겨우 얻은 짧은 휴가에 어디로 갈지 망설였지만 그냥 맘 가는대로 가보기로 하였다.
장마가 끝난후에 오히려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 비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으나, 언제 내가 날씨 걱정하며 길을 나섰던가.

 

홀로 길위에 서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홀로 길위에 서는 일은 쓸쓸한 일이다.
그럼에도,
홀로 길위에 서는 일은 자유로움 때문이다.

바람을 닮은 자유.

 

최대한 간편하게 행장을 꾸린다.
이미 외로움과 쓸쓸함이란 묵직한 짐을 두 어깨에 짊어졌으므로...

 

외로움.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했었지.

 

항상 가지고 다니던 28리터 배낭을 제껴두고,
15리터 작은 배낭에 옷가지 몇 개와 얇은 담요 하나와 어김없이 큰 지도책을 조각낸 지도 몇 장을 챙긴다.
여행길에 얇은 담요를 지니고 다니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이른 새벽 남도로 가는 기차안에서 나는 내리 대 여섯시간을 잤다.
꿈을 꾸었던가.
어슴프레 개펄에 어둠이 내리고 저 건너에 점점히 작은 불빛들이 춤을 추고 있는 작은 포구에서

목적도 없이 설렁 설렁 걷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던가.

 

별 목적없이 떠난 길이었다.
마음이 동하면 순천에 내려 부산행 버스를 탈 수도 있고, 여수항에 나가 어디론가 먼 섬으로 떠나는 배를 탈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마음가는대로 발길닿는대로 가보자는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면...그랬다.

 

기차에서 내리니 복잡한 머릿속이야 어찌 돌아가건 생체시계는 아주 정확해서 무언가로 위장을 채워넣을것을 요구한다.

삶은 연극과 달라서 삶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그 무엇보다 먼저라고 하지 않았던가.


순천역에 내려 역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으며 어디로 갈지를 잠시 고민한다.
순천은 이미 여러번 와 본 곳이고, 여수 앞바다도 내겐 익숙한 동네다.

 

막연하게나마 고흥반도에 가야지 해놓고 왜 순천으로 왔을까나...알 수 없는 사람.
아마도 기차를 타고 싶어서였을게다.

 

개펄이 유명하고 갈대들이 아름답다는 순천만에 가보기로 했다.
원래 그러한 관광지의 명성이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다는 것쯤 알고 있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고, 곽재구의 포구기행을 읽으며 가보고 싶었던 화포라는 이름을 가진 포구와 가까워서 그리로 가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좋은 동행을 만났다.
'서보경'이란 친군데, 군대 다녀와 아직 휴학중이라 했다.
집이 대구인데 벌써 한 1주일째 전국을 기차를 타고 돌고 있다고...
철도청에서 18~25살까지의 젊은이들에게 무료 승차권을 제공한다고 했다.
흐미~~부러버라~~~~

 

이미 예감했듯이 순천만은 내게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용산 전망대까지의 왕복 4km가 넘는 길을 좋은 동행덕에 즐겁게 다녀올 수 있었다.

순천만에서 화포를 가려면 지도상으로는 큰 도로로 나가서 다시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보경씨랑 음료수 한 잔 하며 앉아 이런 저런 얘기 하다보니 순천만에서 시간을 많이 흘려 보냈다.

 

화포로 가는 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다.
순천역 앞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화포에는 민박집이 없다고 한다.
또한, 화포까지 다니는 버스가 몇 시까지 다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겠다. 꼭 오늘 화포에 가야하는건 아니지 않는가.

남원으로 간다는 보경씨와 순천만 입구에서 헤어져 나는 지도를 보며 그냥 설렁 설렁 작은 마을들을 걷는다.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드는걸 보니 어쩌면 나는 오늘 화포를 지나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것이 있어야 그리움이 남는 법이다.

 

1시간 이상을 걸어 인월사거리라는 곳까지 나오니 벌교와 순천으로 가는 2번 국도와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화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작은 간이 정류장에 앉아 생각을 정리한다.

 

내일 아침 어디로 가고 싶지?
외나로도.

 

그러면 오늘 벌교쪽으로 넘어가는게 움직이는데 편하다.

그렇게 벌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벌교도 예전에 거쳐간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은 동네다.

 

화포는 나중을 기약한다.

채워지지 않은 그리움이 언젠가 내 발길을 이곳으로 돌리게 하리라.

 

 

언젠가 늦가을에 혼자서 금강 하구에 있는 신성리 갈대밭에 갔던 적이 있었다.

키 큰 갈대들이 서걱 서걱 울고 있던 그 갈대밭에...

 

순천만의 갈대들은 그 갈대들과는 사뭇 달랐다.

같은 사물이라도 시간과 장소 그리고 내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리라.

 

 

용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순천만.

입구에서 용산 전망대까지는 편도로 2km가 약간 넘는데 습도가 높은 무더운 날씨에 땀을 많이 흘렸다.

 

 

순천만에 살고 있는 녀석들.

짱뚱어 새끼란다.

나중에 벌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기사님께 물으니 이름을 다르게 알려주셨는데 머리 나쁜 나는 잊어버렸다. -.-

 

벌교에서 짱뚱어탕을 먹어보려고 했는데 갈아서 나오는게 아니고 통째로 나온다고 해서 못 먹을것같아 포기했다.

근데, 좀 아쉽네...못 먹어도 시켜나 보기라도 할것을...

 

 

농게라고 했다.

줌으로 당겨찍어 그렇지 작은 녀석인데 집게발은 무섭게 생겼다.

집게발만 빠알간게 인상적이다.

 

---------

 

 

내 꾸러미들. 

여행을 하면서 많이 걷곤 하는 나는 가능한 짐을 간편하게 꾸려 다니는 편이다.

저리 간편해 보여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속옷, 짧은 소매 셔츠 2개, 긴소매 셔츠 1개, 반바지 1개, 구기면 무지 작아지는 얇은 점퍼 1개

수건과 세면도구, 양말 1개, 얇은 담요, 선글래스,  작은 맥가이버 칼, 천으로 만든 잡주머니 1개

헤드램프 그리고 책 한 권.

 

얼마 전 읽은 소설에 애팔래치아 트레일(거의 3,500km란다.)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소설속에서 한 사람이 말한다.

너무 힘이 드니 등에 멘 라면스프의 무게조차 느껴지더라고...

그 말이 많이 와 닿더라.

 

카키색 작은 가방안에는 작은 메모장과 펜, 디카와 전화, 현금, 카드 등이 들어있고, 빈 공간에는 사탕들이 가득 들어 있다.

여행을 할 때 나는 꼭 사탕을 들고 다니는데 사탕 몇 알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여행 길 낯선 마을에서 낯선 집에 잠시 들어갔을 때,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때,

오며 가며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사탕 몇 개가 뇌물도 아니고 그 분들에게도 사탕 몇 알이 별거는 아니겠지만,

그 사탕 한 알이 낯선 나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것은 부인할 수 없다.

 ^^